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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취미에도 ‘격’이 있을까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5
  • 요즘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취미는 단순한 여가 활동을 넘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도피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취미는 선택적인 여가를 넘어, 삶의 균형을 지키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필수적인 통로로 자리 잡았다.또한, 본업에서 충족되지 않는 만족이나 성취를 채우고자 할 때, 취미는 자기표현의 장이 되기도 한다. 직업으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일들을 자유롭게 실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취미란 본디 개인의 내적 만족과 사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자유로운 활동이지만, 사회적 맥락과 타인의 시선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는 종종 달리 해석되곤 한다. 어떤 활동은 세련됨과 교양을 상징하는 고급 취미로 일컬어지며 사회적 지위나 안목의 지표로 여겨지기도 하는 반면, 또 다른 활동은 단순한 여가 활동이나 가벼운 오락으로 치부되며 그 깊이나 가치를 평가절하당하기도 한다. 이렇듯 동일한 취미라는 이름 아래 놓인 활동들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규범과 문화적 인식에 의해 위계화되며, 때로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품격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그렇다면 실제로 취미에 격이 존재하는 것일까. 와인 테이스팅, 골프, 고급 악기 연주 등은 큰 비용과 자원이 요구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산책, 독서, 손바느질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활동은 낮은 격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이와 같은 차별적 인식은 경제적 비용과 사회적 지위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된다. 비용과 장비, 장소 등이 요구되는 활동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얻지만, 별다른 자원이 필요 없는 활동은 가볍게 취급된다. 또한, 희소한 기술이나 전문성이 필요한 활동은 특별하게 평가되지만, 뜨개질이나 그림 그리기처럼 몰입을 요하는 활동은 단순한 여가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취미의 격 차이는 활동 그 자체의 본질보다는 외부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취미의 가치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나 타인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해당 활동에 얼마나 몰입하고 어떤 경험을 얻는가에 있다. 동일한 악기 연주라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며 자기만의 음악적 성취 추구와 단순히 사회적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취미의 의미는 경제적 비용이나 사회적 시선보다는 개인이 활동을 통해 느끼는 성취감, 성장 경험, 그리고 삶에 부여하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결국 취미의 격은 외부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얼마나 그 활동에 몰두해 그 과정에서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고급 취미와 하급 취미의 구분은 사회적 편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취미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삶의 가치를 더해가는 경험을 쌓는 것. 그것이 진정한 취미의 가치가 아닐까.글 김나연 기자
  • 등록일2025-10-01 12:52:44
[553호] 차가운 도시의 불빛에서 피어난 사랑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2
  • 거대한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화려하다. 수많은 불빛이 거리를 채우고 사람들은 바쁘게 각자의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종종 외로움에 부딪힌다. 영화 은 바로 그 외로움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이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눈치를 보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재희와 반대로 계산적이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성소수자 흥수가 클럽에서 만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같은 대학 동기지만 둘은 소위 아웃사이더로 불리며, 재희는 클럽 죽순이로 이름을 날리고 흥수는 성 정체성이 들통날까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학교에 다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흥수에게 재희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드문 존재였고, 재희에게 흥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상대였다. 둘은 서로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순간이 쌓이며 그들의 관계는 점점 특별한 무게를 가지게 된다.영화는 20살부터 33살까지 재희와 흥수가 함께한 13년의 세월을 깊이 있게 담아낸다. 연애와 유흥에 빠져 지내던 20대 초반을 지나 군 생활을 하는 흥수와 취업 준비에 집중하는 23살의 재희, 사회 초년생으로 성장한 27살의 재희와 여전히 방황하는 흥수. 가까웠지만 점차 다른 길을 걷는 두 사람의 삶은 청춘의 불안과 흔들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쌓이는 어른으로서의 고민을 그대로 비춘다.극 중 흥수는 성소수자인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 사회가 주는 멸시와 낙인의 시선은 그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춘 채 버텨내야 했다. 그러나 작아지는 자신을 극복하고자 처음으로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결심한다. 냉정한 반응을 예상했지만, 흥수의 엄마는 자기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극장에 가 유명한 성소수자 영화를 찾아본다. 그런 엄마의 반응을 보며 용기를 얻은 흥수는 더 이상 숨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한다. 늘 계산적이던 흥수가 계산을 내려놓고 단순해진 순간이었다.영화 초반, 재희가 흥수에게 건네는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겠어라는 대사는 큰 울림을 준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약점을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뼈 있는 질문이자, 도시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관계의 출발점임을 일깨운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그 다름 속에서 발견한 애정은 결국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허물고 연대의 가능성을 말해준다.사랑이란 이해의 문제가 아닌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재희의 사랑 또한 자신과 상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수많은 형태의 관계 속에서 나다움을 지킬 수 있다면, 그 관계 역시 사랑이라 할 수 있다.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과 우정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때로는 우정이 사랑보다 더 깊은 이해와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도시라는 복잡한 공간 속에서, 서로를 지탱해 주는 관계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법일지도 모른다. 둘은 도시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기대며, 그 과정을 통해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씩 찾아간다.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누군가의 약점을 바라보면서도 그 곁에 남아주고, 그 불안함마저 껴안아 주는 것. 서로의 상처와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켜주는 태도야말로 대도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우정의 법칙이자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도시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의 힘이다.글 박유빈 기자
  • 등록일2025-10-01 12:51:47
[552호]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131
  • 우리는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 직장, 인간관계까지 모든 영역에서 비교와 서열화가 작동한다. 경쟁이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여겨지나, 그 이면에는 인간성과 공동체성을 침식시키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경쟁은 개인의 동기를 자극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삶의 전반을 지배할 때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잃게 된다. 먼저, 심한 경쟁은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 타인의 성과는 곧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식되고, 실패는 무가치함으로 연결된다. 성과 중심의 문화는 사람을 성과 생산 기계로 만들고,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소외되고, 그 소외는 분노와 좌절로 이어진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발전을 추구했지만, 그 대가로 마음의 평화와 인간다운 삶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또한, 경쟁은 공동체를 해체할 우려가 있다. 타인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이겨야 할 존재로 인식되며, 신뢰는 약화한다. 조직 내에서도 팀워크보다 개인의 성과가 우선시되고, 정보 공유는 경쟁에 불리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꺼려진다. 이는 조직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구성원 간의 인간적 유대감을 약화시킨다. 공동체는 더 이상 함께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공간으로 변질된다.경쟁은 사회 구조의 불평등도 심화시킨다. 겉보기엔 공정해 보이지만,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확대한다. 교육, 취업, 주거 등 삶의 핵심 영역에서 경쟁은 기회의 불균형을 고착화하고 사회적 이동성을 제한한다.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반복적으로 승리하며, 계층 간 갈등은 깊어진다. 패배한 이들은 체념하고, 승자들은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상호 이해와 연대는 사라진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윤리의식의 약화다. 결과 중심 사고는 편법과 부정행위를 정당화하고 정직과 성실은 경쟁에서 불리한 요소로 여겨진다. 과정의 정당성은 무시되고, 성공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특히 공공 영역에서도 성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신뢰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효율을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윤리와 정의라는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고 있다.물론 경쟁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건강한 경쟁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인간관계마저 경쟁의 틀 안에 가두게 될 때, 우리는 사람다움을 잃는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협력과 공감 없이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제는 경쟁 중심 사회의 구조를 재검토해야 한다. 성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협력과 연대를 촉진하는 문화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성공의 기준을 존중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경쟁을 넘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글 정수빈 기자
  • 등록일2025-09-03 16:33:29
[552호] 서울은 기회의 문일까, 버거운 장벽일까?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114
  • 서울은 대학생에게 늘 양가적인 공간이다. 화려한 빌딩 숲은 꿈의 무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끝없는 경쟁과 탈진이 숨어 있다. tvN 드라마 은 쌍둥이 자매 미지와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같은 도시가 얼마나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서로 다른 자매의 시선주인공 미지의 쌍둥이 언니 미래는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다. 그러나 동생 미지가 손을 잡으며 서로의 삶을 바꿔 살아가기로 했다. 발목 부상으로 방 안에 머물던 미지는 언니의 자리를 대신해 서울의 현실을 마주한다. 동창 호수는 비밀을 알면서도 곁을 지켰으나, 청각 손상이 찾아오자 자신이 짐이 될까 두려워하며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유도 모른 채 이별 앞에 선 미지는 홀로 남겨진 순간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마침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설 용기를 얻는다.반대로 미래는 두손리에서 농장주 세진을 만나며 도시의 속도를 벗어났다. 성과와 숫자가 아닌 땅의 리듬 속에서 그는 작물은 제때 자라고, 사람은 제때 쉬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배우며 자신을 되돌아본다.드라마가 보여주는 서울의 얼굴출근 전쟁, 끊임없는 알림음, 회색 빌딩의 장면은 미래가 체감한 서울을 보여준다. 성과표와 보고 루프 속에서 사람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도시는 청춘에게 피로의 리듬을 강요한다.반면 두손리는 흙을 일구고 씨앗을 심는 느린 리듬을 제시한다. 그러나 서울은 차갑기만 한 공간도 아니다. 호수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청력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경쟁 속에서도 연대와 돌봄의 온도가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드라마 곳곳에 등장하는 문은 서울의 문턱과 장벽을 은유한다. 방 안에서 문을 여는 미지, 회의실 앞에 주저앉는 미래, 법정에 선 호수의 모습은 청춘이 현실을 넘어서는 힘을 드러낸다. 결국 서울은 성취의 기회를 주면서 동시에 소진을 강요하고, 연대와 온도를 품은 다층적 공간으로 제시된다.대학생에게 던지는 질문이 작품은 화려한 성공담을 쫓기보다 자매의 선택을 통해 우리가 쉽게 외면해 온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살아가야 하는가 대학생에게 이 물음은 낯설지 않다. 졸업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며 불확실한 미래를 체감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미래와 미지의 여정은 빨라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각자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그려진다.작품은 성공의 정의는 결코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서울은 기회의 문일까, 버거운 장벽일까 드라마는 답을 내리지 않고, 시청자가 자신의 삶에서 답을 찾도록 거울을 건넨다.대학생에게 서울은 취업과 기회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좌절을 안기는 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은 그 좌절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시간 또한 여정임을 보여주며 느려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나 역시 서울을 꿈꾸지만 그 무게에 주저한다. 하지만 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일깨운다. 자매처럼 서로 손을 잡는 순간, 우리도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지금 대학생에게 꼭 필요한 자기 성찰의 안내서다.당신은 어떤 얼굴의 서울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드라마는 작품을 넘어 오늘을 사는 청년들의 자화상을 비춘다. 성취와 좌절, 도전과 멈춤이 교차하는 현실을 보여주며, 시청자가 스스로의 속도를 성찰하도록 이끈다.특히 불확실성과 피로가 일상이 된 시대에, 청춘이 지닌 회복력과 연대의 힘을 다시금 일깨운다. 누군가의 걸음을 따라가기보다 자기만의 보폭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상기시킨다.글 박수현 수습기자
  • 등록일2025-09-03 16:22:51
[551호] 익숙함 속에서 다시 만난 나 4박 5일 도쿄 여행기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150
  • 종강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곧바로 여행길에 올랐다. 자유로운 시기가 오면 꼭 국내외를 마음껏 여행하겠다는 다짐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품어온 나의 오랜 바람이었다.그 다짐 속에서 자라난 나는 마침내 성인이 되어 대학교 네 번째 학년의 종강을 맞은 6월 13일, 잠시나마 그 약속을 실현하고자 길을 나섰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는 일본 도쿄였다.사실 일본은 이미 여섯 차례나 다녀온 익숙한 곳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결코 잦은 방문은 아닐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되풀이된 선택이었다. 평소 나는 같은 장소를 반복해 찾기보다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새로운 나라를 발굴하는 쪽을 선호해왔다.그럼에도 이번 여행지를 다시 일본으로 정한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초 계획은 튀르키예나 호주 같은 낯선 대륙을 탐방하는 것이었지만, 종강 직후 일정상 학교를 다시 방문해야 하는 상황 탓에 장거리 이동은 어려웠다. 결국 가장 익숙하면서도 타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일본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함께 떠난 동생은 이번이 일본 첫 방문이라는 점도 도쿄행을 결정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총 4박 5일간의 짧지만 밀도 높은 일정이 이어졌다. 동생과 나는 여행 성향이 상당히 달랐기에 첫째 날과 넷째 날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방식으로 도쿄를 경험했다.첫날은 숙소에 함께 도착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을 공유했고 넷째 날은 함께 도쿄 디즈니씨를 방문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하루의 끝에는 마주 앉아 저녁을 함께하며 각자의 하루를 나눴다.이번 도쿄 여행은 단순한 반복 방문이 아니었다. 익숙함 속에서도 매번 다른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사유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거리의 소리, 사람들의 표정, 계절의 공기.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특히 동생의 첫 일본 여행을 곁에서 지켜보며 처음이라는 감정이 지닌 순수한 호기심과 설렘이 여행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반복되는 장소도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여행이 단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같은 거리와 풍경이었지만, 동생의 신선한 반응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 또한 처음 보는 듯한 시선으로 도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익숙하던 골목도 새로운 표정으로 다가왔고,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도쿄에서 보낸 5일은 비록 짧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내면의 작은 떨림들과 생각의 갈래들이 정리되는 듯한, 차분하면서도 다층적인 여행이었다. 익숙한 공간에서도 새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행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고, 반복된 풍경 속에서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낯섦보다 익숙함이 더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는 것을 이번 여정을 통해 다시금 실감했다.글 김나연 기자
  • 등록일2025-07-03 13:32:20
[551호] 한국 민주주의, 정당 없는 광장의 시대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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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던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날 심각한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강력한 대통령 직선제, 독립적인 선거관리위원회, 견제와 균형을 위한 대법관 임기제 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가 작동하는 현실의 모습은 우려를 낳는다.정치의 일상은 점차 민주주의의 규칙보다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극단적인 정치 혐오와 양극화, 민주주의 피로감이 확산되고 있다.책 에서는 민주주의의 붕괴는 쿠데타나 혁명이 아닌, 제도 안에서의 규범 파괴와 반민주적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경고한다. 이들의 논의는 미국 정치를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여야 정권 교체 이후 꾸준히 높은 정치체 점수를 유지해 온 한국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정당 간 적대, 정체성 정치, 광장 중심의 정치 동원 등 민주주의 규범을 위협하는 징후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무엇보다도 정당 정치가 사실상 광장 정치에 자리를 내주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단위였던 정당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대규모 집회나 SNS를 통해 여론을 동원에 의존하며, 이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정당 내부 숙의와 타협 과정을 생략한 채, 다수의 목소리를 민심으로 포장하여 정책 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특히 2016년 촛불집회의 긍정적 경험은 상시적인 광장 정치의 기반이 되었고, 정치인들은 정당 내 책임보다 거리의 이미지 관리와 팬덤 동원에 집중하게 됐다.이러한 정치 환경은 정치적 정당성과 동원 능력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대규모 집회는 정치적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반대 의견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위축된다. 정치 경쟁은 정책과 비전보다 생존을 건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대통령의 사면권과 입법 거부권이 정쟁 수단으로 남용되고, 국회의원 3분의 2 동의가 필요한 탄핵제도조차도 정치적 무기로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정치의 사법화 역시 심화되고 있다. 정책과 정치적 분쟁이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실질적인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법정에서 패소했을 때 이를 수용하지 않고 사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향후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성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논란은 한국 정치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시민들의 강한 저항은 제도 밖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지만, 이후 펼쳐진 정치 상황은 광장 정치의 위험성과 정당 정치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선거 불신, 음모론, 정치인의 책임 회피는 미국식 탈진실 정치와 닮아가고 있으며, SNS와 여론전은 정당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정당은 이제 정책보다는 팬덤과 동원력으로 움직이며, 광장에서 부상한 정치인이 당을 장악하고 대통령은 여당 위에 군림한다. 의회는 여야의 극단적 대립 속에 정쟁의 무대가 되었고, 정당 내부의 자율성은 실종됐다.민주주의 회복은 제도만으로 불가능하다. 갈등을 제도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광장에 맡기면 민주주의는 본래의 궤도를 잃게 된다. 정치인들은 책임 있는 지도력으로 정당 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시민들은 비판적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키려는 시민의 의지와 정치인의 절제가 함께할 때만 민주주의는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글 조혜원 기자
  • 등록일2025-07-03 13:31:34
[550호] 사랑이 부족한 사회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 조회수237
  • 오늘날의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을 언제어디서든 연결하게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모두가 시공간을 넘어 연결된다는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비해 내면은 텅 빈 고립감에 시달린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도, 경제도 아닌 사랑의 결핍이다.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개인 간의 감정적인 관계를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타인에 대한 이해, 공감, 존중, 관심을 포괄하는 인간다운 감정이자사회의 본질적인 기반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점점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불신과 혐오의 시선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특히 SNS를 통해 익숙해진 비난 문화는 이제 현실에서도 거리낌 없이 드러나고 있다. 익명성과 속도에 길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실수나 다름에 대해 참거나 이해하기보다 단호하게 지적하고 몰아세우는 데 익숙해졌다. 타인을 향한 언어는 거칠어졌고, 툭 던진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공공장소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비판이 앞서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더욱 심각한 것은 SNS에 올라온 비난적 게시글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개인의 관점이 아닌 집단의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내리는 일이 많아지며, 사실 확인 없이 확산되는 무분별한 혐오가 사람 간 신뢰를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체에 사랑과 공감이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다.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고 삶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태도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사랑이 자리해야 할 곳에 차가운 판단과 감정적 폭력이 들어섰고, 그 결과우리는 서로를 점점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되었다.이러한 정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아이들은 공감보다 성과를 먼저 배우고, 어른들은 여유와 배려보다 생존을 우선시한다. 공동체는 약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벽이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사랑이 사라진 자리는 고립과 외로움, 그리고 무관심이 차지한다. 이러한 사회는 결국불안정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도 어려워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관계의 본질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이다.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거창한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작지만 진심 어린 관심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작은 친절을 건네며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고 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나 기술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이다. 그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진보의 시작이 될 것이다.글 정수빈 기자
  • 등록일2025-05-14 13:38:07
[550호] 용문산을 오르며 돌아본 나의 내면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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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에게나 그런 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높은 봉우리일 뿐인데, 막상 그 산을 오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달라진다. 나에게 그 산은 지난연휴 때 다녀온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다.등산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봄바람이 불어오던 날 친구의 제안으로 무심코 따라나선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 무심한 한 걸음이 어느새 나를 흔들고 있었다.용문산은 해발 1,157m로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생각보다 위엄 있는 산세를 자랑한다. 그곳의 초입에서 나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은행나무 앞에 섰다. 수령 1,100년 이상, 높이 40미터가 넘는 거목은 그 자체로 말이 없었다.용문산은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창건된 사찰 용문사와 함께 역사와 시간을 함께 품고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삼층사리탑, 나한상이 모셔진 미소전 등 고즈넉한 공간들이 등산객을 맞는다. 그 안에서 나는 문득 시간을 버틴다는 것에 대해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도, 사찰도, 바위도, 그리고 저 멀리 지나간 사람들도 그 시간 속에 무엇을 지키고 있었을까. 바쁘게만 살던 내 일상 속에서는 쉽게 할 수 없던 질문이었다.등산로는 마당바위, 가섭봉을 지나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왕복 8.1km, 순수 등산 시간만 3시간이 넘는 길이었다. 헉헉대며 돌길을 오르며 나와 묵묵히 대화를 나눴다.이렇게까지 올라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중간에 만난 이름 모를 계곡과 휘청거리며 웃던 사람들의 모습이 내 의지를 조금씩 붙잡았다. 그리고 가섭봉 정상에 올랐을 때, 그곳에는 그저 바람뿐이었다. 세상을 다가진 듯한 풍경은 없었지만, 가슴 속 무언가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하산길에 마주한 청춘뮤지엄이라는 복고테마 전시관에 들렀다. 1980-90년대 학창 시절의 물건과 풍경들이 반갑게 맞았다. 그것은 내 삶 이전의 시대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따뜻했다. 누군가의 청춘이었던 시간이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용문산 아래 식당에서 맛본 더덕구이와 쌈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고된 산행 후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그 한 끼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달래주었다. 오롯이 자연 속에서 걷고, 보고, 먹고, 쉰 하루. 나는 그날, 내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주워 담는 기분이었다.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용문산 여행을 통해, 오히려 오래된 것을 통해 새롭게 느낀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은 버팀이었다. 오래된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듯이 나도 내 삶의 어떤 가치들에 대해 더 단단히 뿌리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높이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살아온 교훈이었다.글사진 이현준 기자
  • 등록일2025-05-14 13:37:26
[549호] 우리가 만들어낸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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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글맘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의 이상한 행동이 걱정되어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에게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서로의 입장이 엇갈리며 의심과 오해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나며 모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다.영화 은 총 3개의 파트로 나뉘어 전개되며, 사오리의 시선으로 영화가 시작된다.사오리의 시선싱글맘 사오리는 미나토의 행동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아들이담임인 호리 선생에게 학대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방문하게 된다. 사오리는 차분히 설명하지만, 교장과 교직원들은 성의 없는 답변과 형식적인 사과만 반복한다. 이 장면을 볼 때 이 영화의 괴물은 학교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오리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매일 학교에 찾아간다. 어느 날 참고 있던 호리선생이 미나토가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충격 발언을 한 후 선생의 시선으로 내용이 새롭게 전개된다.호리 선생의 시선호리 선생의 시선에서 미나토의 친구 요리가 새롭게 등장한다. 미나토는 요리 관련한 일에 있어서 자주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학교 측은 미나토의 장래를 위해 얘기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사오리의 집착과 미나토의 거짓 증언이 더해져 사건은 더 악화되어 결국 호리선생은 기자회견에서 사실이 아닌 자기 잘못을 사실로 인정해 버리며 몹쓸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사오리의 시선에선 너무나 가식적이었던 학교 측이 호리 선생의 시선에선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괴물은 미나토구나라고 다시 생각했다.미나토의 시선사실 미나토와 요리는 우정이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리는 이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돼지의 뇌라고조롱을 받으며 학대당하고 있었다. 미나토는 정체성이 확립되지도 않은 시기에 이 감정에 대해 혼란스럽고 두려워하며 요리와의 관계에 용기 내지 못했다. 요리는 반 아이들이 괴롭히는 대상이었기에 더욱 친분을 숨기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사건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미나토의 시선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미나토도, 요리도, 학교도, 선생도, 그 누구도 괴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엔딩 장면이다. 폭풍우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난 날, 미나토와 요리가 산속에 있는 둘만의 아지트인 망가진 열차 안에 들어가 넓은 풀숲을 둘이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영화는 끝이 난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감정이 거부당하는 현재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둘이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장면만 보면 해피엔딩 같으면서도 너무나 화사하고 행복하게 담긴 결말이 현실에선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남겼다.영화를 보고 난 후 관람평을 찾아보다 누군가 괴물일까 영화 내내 찾으려 하는 내가 제일 괴물 같다는 문장을 읽고 난 후 머리를 한대 맞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에 괴물은 그 누구도 아니다. 그저 각자가처한 상황과 사회 관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들을 내 시선에 맞추며 괴물은 누구인지 찾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이 영화는 단순히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시선과 편견이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괴물로 만들어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누군가를 괴물로 단정 짓기 전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 을 추천한다.글 한선영 기자
  • 등록일2025-04-09 12:19:21